화창한 날씨와 길어진 햇살,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생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게 봄은 설렘보다 무기력함을 가져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계절의 변화가 반드시 기분 좋은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무기력, 봄의 역설
봄은 흔히 희망과 새 출발의 계절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봄이 불러오는 심리적 무기력과 감정적 피로가 자리하고 있다. 따뜻한 햇살과는 정반대의 기운이 내면에 자리잡으며, 일상은 느리게 흐르고, 몸은 쉽게 지치며, 외출보다 침대가 더 가까워진다.
이러한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계절성 우울장애'가 지목된다. 일반적으로 겨울철 일조량 부족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봄철에도 갑작스러운 일조량 증가로 인해 멜라토닌 조절이 어려워지고 감정 기복이 심화될 수 있다. 의학계에서는 이 현상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 불리는 봄철 자살률 증가 현상도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에 따르면 봄철 자살률은 겨울철보다 20~30%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이러한 수치는 계절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단순한 기분 전환을 넘어 신경화학적, 심리사회적 요소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무기력은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나 의지 부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는 '자기비난(Self-Blame)'을 유도하며, 결국 무기력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윤대현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무기력함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이를 잘 견디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대응”이라고 조언한다.
🌸 변화, 설렘과 스트레스의 이중주
봄은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학교는 새 학기를 시작하고, 기업은 인사이동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결혼, 이사, 취업 등 크고 작은 변화가 줄줄이 이어지는 시기다. 그러나 이 변화가 모두에게 설렘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한양대학교 한창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봄철은 심리사회적으로 매우 격동적인 시기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이 심리적 피로감을 가중시킨다”고 말한다. 실제로 스트레스는 ‘부정적 사건’에만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사건에서도 똑같이 신체와 감정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 출산, 승진, 이직은 분명히 긍정적인 삶의 이벤트이지만, 동시에 큰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이로 인해 마음속 ‘스트레스 저수지’는 점점 고갈되고, 회복 탄력성이 떨어지면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청년층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심리적 탈진을 경험하기 쉽다.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변화는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변화 앞에서 무기력을 느낀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며 힘겨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감정이다.
🌥 감정과의 거리두기, 무기력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현대인은 무기력함을 느낄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보, 빠른 사회 흐름, 타인의 성공을 실시간으로 비교하게 만드는 SNS 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은 부정되고 억제되기 쉽다.
그러나 윤대현 교수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70~80%는 원래 부정적인 감정이며, 이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본능”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억제하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핵심이다.
실패나 낙오에 대한 경험은 쉽게 ‘나는 약한 사람’이라는 자기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유리멘탈이야”라는 말은 자기 인식을 틀 안에 가두고, 그 안에서 점점 더 무기력해지게 만든다. 이러한 말의 반복은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공격하게 되며, 자기 확신을 약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감정을 인정하는 용기'다. 무기력함을 겪는 자신을 부정하거나 밀어내기보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회복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감정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습관은,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무기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결론: 무기력한 봄날, 나를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
‘무기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은 때때로 우리를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보다는 ‘지나가야 할 시기’, ‘버텨야 할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건강한 접근일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무기력의 순간에 ‘선행동 후 동기부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즉, 동기가 생겨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움직이면 동기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 잠시 산책을 나가거나, 평소 가보고 싶던 카페를 찾아가는 일, 벚꽃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것 같은 소소한 행동들이 무기력의 문턱을 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시작한 행동 하나가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다시 다음 행동을 유도한다.
결국, 우리는 이 무기력한 봄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야 할 계절'로 받아들이면 된다. 무기력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다.
이번 봄,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처럼 보여도, 나만은 뒤처진 것 같아도 괜찮다.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도 역시 ‘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속도로 이 계절을 지나 다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