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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교태전 전경 출처: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www.heritage.go.kr) |
조선 왕비의 공간, 교태전. 그 이름 앞에 서면 나는 문득 발을
멈추게 된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지만 위엄이 있었고,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조선의 궁궐을 걷다 보면, 가장 고요한 곳에서 가장 단단한 힘이 느껴지곤 한다. 그
중심에 교태전이 있었다.
궁궐 한복판, 고요함으로 권력을 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그 공간 배치는 유교적 이상과 왕실 권위의 체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가운데 교태전은 근정전의 바로 뒤편에 있다.
왕이 정사를 논하던 근정전의 후면, 곧 왕비의 공간이자 궁궐의 속살이 바로
이곳이었다.
‘교태’라는 이름은 『주역』에서 온 말이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뤄 태평한 세상을 이룬다는 뜻.
이런 이름을 왕비의 처소에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의 이상은 단지 강한 왕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왕비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조화로움에 의해 유지되었다.
단청과 문양, 침묵 속에서 말을 걸다
나는 교태전 앞에 서면 늘 천천히 걷는다.
그 천천함 속에서 이 전각은 말을 건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단청, 복(福) 자 형의 창살, 곤녕합으로 이어지는 복도.
모두가 왕비의 고요한 권위, 그 절제된 품위를 담아내고 있다.
곤녕합은 ‘땅의 평안’이란 뜻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땅’은 여성을 상징했고, ‘평안’은 그 권위의 안정성을
말해준다.
이곳은 누구보다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 내명부의 질서와 조정의 균형이
있었다.
왕비는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궁중의 법이었다.
불에 타고, 다시 세우고, 그리고 지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경복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교태전도 함께 사라졌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이 전각은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졌지만, 고종 황제의 경복궁
중건으로 다시 세워졌다.
나는 이 복원이 단순한 재건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왕비의 자리를 복원한 것은, 곧 조선의 중심을 되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복원 작업은 철저했다.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문양 하나, 기와 하나까지 옛 모습을 따라갔다.
오늘 우리가 보는 교태전은 단지 겉모습의 재현이 아니라, 조선의 정신이 다시
호흡을 시작한 결과다.
왕비의 후원, 조선의 안쪽을 걷다
교태전 뒤편에는 아미산이 있다.
작은 인공 언덕이지만, 나는 이곳을 경복궁에서 가장 인간적인 풍경이라 말하고
싶다.
돌계단과 꽃밭, 연못과 산책로.
왕비가 바람을 느끼며 걷던 길,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 고요함이야말로, 조선을 지탱한 힘이었구나.”
소리 없는 권력, 그 절제된 아름다움.
교태전은 권위와 품격, 그리고 여인의 깊은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마침내, 교태전 앞에 서면
요즘은 교태전이 항상 개방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경복궁을 찾을 때마다 이 전각을 먼저 찾는다.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자세가 바르게 된다.
이곳은 조선의 왕비가 머물렀던 공간이지만, 동시에 조선이 숨 쉬던 자리다.
그 고요한 기운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말을 걸어온다.
만약 경복궁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근정전뿐만 아니라 이 교태전 앞에도 꼭
발걸음을 멈춰보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고요한 권력이 어떻게 조선을 지탱했는지를.